시간, 성장, 가족의 형태: 〈보이후드〉가 말하는 삶의 파편들

도입부: 12년간의 작은 삶을 담아낸 거대한 실험

한 사람의 삶을 영화로 담아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그것이 실시간의 성장, 실존 인물들의 변화, 그리고 연출된 각본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하이브리드한 방식이라면 그 어려움은 상상 이상일 것이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보이후드〉는 이러한 도전에 정면으로 응답한 작품이다. 단순한 청소년 성장영화도, 감성적인 가족 드라마도 아닌 이 영화는, 6살 소년이 18살이 되어 대학으로 떠나기까지의 시간을 카메라로 ‘기록’하고 동시에 ‘연출’한다. 그 결과는 단순한 형식 실험을 넘어, 우리 모두가 겪었지만 잊고 살았던 성장의 감정, 부모와의 갈등, 일상의 무심한 풍경까지 선연하게 되살린다.

〈보이후드〉는 12년간 같은 배우들과 함께 같은 캐릭터를 연기하며, 실제 인물의 나이만큼 등장인물도 자란다. 이 놀라운 시도는 흔히 할리우드가 쌓아올린 인위적 시간 구조를 해체하고, 영화 속에서 ‘시간이 실제로 흐른다’는 사실을 관객에게 체험하게 한다. 어떤 대단한 사건 없이 흘러가는 두 시간 반의 러닝타임은 마치 한 사람의 인생을 고요히 지켜보는 것 같은 감각을 제공한다. 지금부터 〈보이후드〉가 보여주는 성장의 실재, 시간의 의미, 가족이라는 유기체에 대해 본격적으로 살펴보자.




성장이라는 사건 없는 드라마: 메이슨의 시간

〈보이후드〉의 주인공은 텍사스에 사는 평범한 소년 ‘메이슨’. 영화는 그가 여섯 살일 때의 모습에서 시작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으로 떠나는 순간까지를 따라간다. 일반적인 성장영화처럼 결정적인 사건이나 비범한 전개 없이, 메이슨은 우리가 그랬듯 학교에 가고, 게임을 하고, 부모의 이혼을 겪고, 연애를 하고, 친구와 멀어지고, 술을 처음 마셔보고, 사회의 부조리를 처음으로 인식한다. 이러한 경험들은 영화 속에서 별다른 드라마 없이 흘러가지만, 바로 그 ‘사건 없음’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다.

메이슨의 성장은, ‘어떤 일을 해냈는가’보다 ‘어떻게 세상을 느끼고 받아들였는가’에 집중되어 있다. 그는 유년기엔 사소한 감정에 울고 웃고, 사춘기엔 부모와 충돌하면서 세상의 위선을 인식하게 된다. 그러다 서서히, 아무런 확신 없이 미래로 걸어 나간다. 영화는 이러한 불확실한 성장의 진실을 조명한다. 관객은 메이슨의 작은 변화들을 통해 자신의 과거를 되짚고, 또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자녀의 감정을 되새기게 된다.

이 영화에서 성장의 감각은 주로 시간의 흐름을 통해 전달된다. 장면 전환마다 인물의 머리 스타일이 바뀌고, 얼굴이 조금씩 달라지고, 주변 인물들의 나이 듦이 피부로 체감된다. 감독은 일부러 챕터 구분도, 시간 표시도 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 스스로 “아, 2년이 흘렀구나”를 감지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무심한 시간의 축적’이 메이슨의 성장, 나아가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이 영화는 한 개인의 성장 서사이자, ‘성장’이라는 보편적인 인간 경험에 대한 가장 미니멀하고도 정직한 영화적 묘사라 할 수 있다.


가족이라는 유기체: 불완전함을 통해 완성되는 사랑

〈보이후드〉는 성장 영화이자 동시에 ‘가족 영화’이기도 하다. 특히 부모의 역할, 그 안에서의 좌절과 헌신, 새로운 구성의 형성과 해체가 반복되는 방식은, 현대 가족의 복잡한 감정을 그대로 담아낸다. 영화의 초반부, 메이슨의 부모는 이혼한 상태다. 엄마 올리비아는 학업과 생계의 이중고를 감당하면서 두 남매를 키우며, 아빠 메이슨 시니어는 자유로운 영혼처럼 돌아오지만, 자녀와의 관계를 회복하려 노력한다. 그 과정은 어색하고 불편하며, 때로는 애틋하다.

올리비아는 영화 내내 ‘현실’의 무게를 짊어진 인물이다. 그녀는 아이들을 위해 도시를 옮기고, 여러 남성과 새로운 가족을 구성해보지만, 그 모든 시도는 완벽하지 않다. 그녀는 좋은 어머니가 되고자 애쓰지만, 아이들과 소통이 단절되기도 하고, 후회도 한다. 메이슨이 대학에 떠나는 마지막 날,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첫 걸음마, 첫 이별, 첫 면허시험... 그리고 이제 떠나는 거야? 다음은 뭔데, 내 장례식?” 이 대사는 부모가 느끼는 공허와 사랑을 동시에 담고 있으며, 관객의 마음을 적신다.

반면 아버지 메이슨 시니어는 이상적인 친구 같지만, 현실적인 책임에선 종종 도망친다. 그러나 그는 자녀와의 교감을 통해 조금씩 변화한다. 후반부에 그는 안정된 직업과 가정을 꾸리며 성숙해진 모습으로 등장하고, 자녀의 삶을 존중할 줄 아는 어른으로서의 역할을 마침내 감당해낸다.

이렇게 〈보이후드〉 속 가족은 완벽하지 않다. 상처도 많고, 실수도 많지만, 그 모든 관계는 아이들의 성장을 돕고 또 영향을 주는 ‘유기체’처럼 작동한다. 링클레이터는 이 가족을 이상화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더 진실한 공감을 이끌어낸다. 이 영화는 “가족이란 결국 서로 실망시키면서도 끝내 함께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조용히 말해주는 작품이다.


시간의 기록과 영화의 형식: 12년의 실험, 그리고 감정의 축적

〈보이후드〉는 제작 방식 자체가 영화사적인 실험이다. 2002년부터 2013년까지, 매해 여름마다 같은 배우들과 함께 촬영한 이 프로젝트는, 링클레이터 감독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긴 시도였다. 그는 줄거리 중심의 서사보다는 ‘시간 그 자체’를 영화로 기록하는 것에 주목했다. 이 영화는 관객이 보는 동안 말 그대로 배우가 나이를 먹고, 인물이 성장하고, 시대가 변한다.

이러한 실험적 형식은 관객에게 완전히 다른 영화적 경험을 제공한다. 배우 엘라 콜트레인(메이슨 역)은 실제로 유년기부터 청년기까지 변해가며, 그 얼굴의 변화만으로도 관객은 감정의 진폭을 경험하게 된다. 또한, 극 중 시대적 배경을 따로 설명하지 않고, 등장인물들이 사용하는 휴대폰, 배경 음악, 대화 주제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2000년대의 흐름이 전달된다. 예컨대,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흐르고, 오바마 선거 이야기가 나오고, 아이폰이 등장하며 관객은 “우리가 그 시대를 함께 지났구나”를 느낀다.

이러한 영화의 시간성과 미니멀리즘은 많은 평론가들로부터 “가장 일상적이면서도 가장 시적인 영화”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 속에는 사건도, 클라이맥스도, 심지어 해결조차 없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인생과 닮았다. 링클레이터는 이 영화에서 성장이나 삶을 ‘교훈’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관객에게 말없이 묻는다. 당신의 보이후드는 어땠는가? 당신도 이렇게 천천히, 조용히 어른이 되어왔던 게 아닌가?


결론: 삶은 순간의 연속이다, 그것이 전부다

〈보이후드〉는 끝내 아무것도 대단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사는 삶과 닮아있다. 대단한 사건 없이 흘러가는 일상, 잘 기억나지 않는 어린 시절의 감정, 부모와 나눈 짧은 대화, 버스 창문에 비친 얼굴… 영화는 그런 조각들을 모아 하나의 인간의 초상을 완성한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메이슨이고, 동시에 누군가의 올리비아일 수 있다. 이 영화는 바로 그 사실을 조용히 상기시킨다. 이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삶은 결국, 지금 이 순간의 연속이며, 그 순간을 어떻게 느끼고 기억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이 결정된다는 것. 그리고 영화는 그 메시지를 관객의 가슴에 가장 조용한 목소리로, 그러나 가장 오래 남을 방식으로 속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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