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는 영화가 관객에게 선사할 수 있는 가장 원시적이고도 본능적인 체험의 극한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단순한 생존 드라마나 복수극을 넘어, 인간이 문명의 외피를 모두 벗어던지고 대자연의 일부가 되었을 때 마주하게 되는 숭고함과 잔혹함을 스크린 위에 고통스러울 정도로 생생하게 구현해낸다. 19세기 미국 서부 개척 시대를 배경으로, 동료에게 버려져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아들의 복수를 위해 수백 킬로미터의 설원을 가로지르는 사냥꾼 휴 글래스(리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여정은, 한 편의 장엄한 서사시이자 인간 의지에 대한 경이로운 찬가다. 이 영화가 관객과 평단의 압도적인 찬사를 받은 이유는, 엠마누엘 루베즈키의 경이로운 촬영술과 리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전설적인 메소드 연기가 결합하여, 우리가 스크린을 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게 만드는 극강의 몰입감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이 글은 <레버넌트>가 어떻게 ‘자연광’과 ‘롱테이크’ 촬영을 통해 신의 시선과도 같은 압도적인 리얼리즘을 구축하는지, 한 인간의 ‘육체’가 견뎌내는 처절한 ‘생존’ 투쟁을 통해 인간 의지의 극한을 어떻게 증명하는지, 그리고 아들을 죽인 존 피츠제럴드를 향한 불타는 ‘복수’의 여정이 그 끝에서 어떤 공허함과 마주하며 더 높은 차원의 질문을 던지는지를 깊이 있게 탐구하고자 한다.
카메라인가, 혹은 신의 시선인가: 자연광과 롱테이크로 빚어낸 대자연의 압도적 리얼리즘
<레버넌트>의 가장 위대한 주인공은 휴 글래스도, 존 피츠제럴드도 아닌, 바로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대자연’ 그 자체다. 이냐리투 감독과 엠마누엘 루베즈키 촬영감독은 이 거대하고 무심한 주인공을 스크린에 구현하기 위해 영화 제작의 관습을 거부하는 극단적인 방식을 택했다. 그들은 인공 조명을 거의 완벽하게 배제하고, 혹한의 겨울, 해가 떠 있는 극히 짧은 시간 동안 오직 ‘자연광’만을 이용해 영화 전체를 촬영했다. 이러한 선택은 단순히 사실적인 화면을 넘어, 영화에 신성함과 경외감마저 부여한다. 차갑고 깨끗한 겨울의 햇살은 설원의 눈 결정 하나하나를 비추고,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들며, 등장인물들의 거친 피부와 입김까지도 날것 그대로 포착한다. 관객은 마치 19세기 서부의 혹독한 자연 한가운데에 던져진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리얼리즘을 극대화하는 또 다른 장치는 바로 루베즈키의 전매특허인 ‘롱테이크’ 촬영 기법이다. 영화의 오프닝, 회색 곰에게 습격당하는 장면, 아리카라 부족의 습격 장면 등 주요 시퀀스들은 편집점을 거의 느낄 수 없는 롱테이크로 촬영되었다. 카메라는 인물들의 등 뒤를 바싹 따라가거나, 그들의 시점이 되어 혼란스러운 전장을 함께 헤쳐나간다. 특히 휴 글래스가 회색 곰에게 공격당하는 약 7분간의 시퀀스는 영화 역사상 가장 충격적이고 사실적인 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카메라는 폭력의 순간을 외면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찢기고 부서지는 인간의 육체를 무덤덤하게 응시한다. 곰의 육중한 숨결이 카메라 렌즈에 김을 서리게 하는 순간, 관객은 더 이상 안전한 관찰자가 아니라, 바로 옆에서 끔찍한 사투를 목격하는 증인이 된다.
이러한 촬영 방식은 자연을 단순한 배경이 아닌, 모든 것을 지배하는 거대한 존재이자 캐릭터로 격상시킨다. 광활한 설원, 얼어붙은 강, 거대한 산맥의 풍광은 때로는 숨 막힐 듯 아름답지만, 동시에 인간의 생사를 아랑곳하지 않는 무심하고도 잔혹한 얼굴을 드러낸다. 인간들은 이 거대한 자연 앞에서 한낱 미물에 불과하다. <레버넌트>의 카메라는 특정 인물의 편을 들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모든 것을 위에서 조망하는 신의 시선처럼, 인간과 동물, 나무와 강,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물고 모든 것을 동등한 무게로 담아낸다. 이 압도적인 리얼리즘은 관객에게 단순한 시각적 쾌감을 넘어, 문명 이전의 세계, 인간이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며 살아가야 했던 원시적 상태를 체험하게 하는 철학적이고도 명상적인 경지를 선사한다.
죽음의 문턱에서 기어 나온 육체: 휴 글래스의 처절한 생존 투쟁으로 증명한 인간 의지의 극한
<레버넌트>는 머리가 아닌 몸으로 먼저 체감되는 영화다. 영화는 러닝타임의 상당 부분을 대사 없이, 오직 휴 글래스의 육체가 겪는 극한의 고통과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보여주는 데 할애한다. 리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이 영화를 통해 마침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거머쥘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단순히 연기를 한 것이 아니라, 휴 글래스라는 인물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스크린 위에 거의 다큐멘터리에 가깝게 새겨 넣었기 때문이다. 회색 곰의 습격으로 온몸의 뼈가 부서지고 목소리조차 낼 수 없게 된 그는, 산 채로 무덤에 묻히고 동료에게 버림받는다. 여기서부터 그의 여정은 인간이 과연 어디까지 생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장엄한 실험이 된다.
그의 생존 방식은 처절하고 원초적이다. 그는 기어가는 것조차 힘겨운 몸으로 수백 킬로미터의 거리를 이동한다. 꽁꽁 언 강물에 몸을 던져 추격자들을 피하고, 날 물고기와 들소의 생간을 씹어 먹으며 허기를 채운다. 눈보라를 피하기 위해 죽은 말의 배를 가르고 그 내장 안으로 들어가 하룻밤을 버티는 장면은, 생존을 향한 그의 의지가 문명인의 이성과 상식을 초월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순간이다. 그는 더 이상 사회적 인간이 아니라, 오직 생존이라는 본능만이 남은 한 마리의 동물에 가깝다. 영화는 이 과정을 통해 관객에게 ‘생존’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온몸으로 느끼게 한다. 우리는 푹신한 극장 의자에 앉아 그의 고통을 ‘감상’하지만, 스크린 속 디카프리오의 떨리는 숨결과 신음,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은 그 경계를 허물고 들어와 우리에게 원초적인 공포와 함께 경외감을 느끼게 한다.
이 처절한 생존의 동력은 바로 아들 ‘호크’의 복수심이다. 그는 환영 속에서 죽은 아들을 끊임없이 만나며, “아빠는 포기하면 안 돼요. 숨을 계속 쉬어요.”라는 목소리를 듣는다. 복수심은 그의 육체가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유일한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의 여정은 단순히 복수를 향한 직선적인 길이 아니다. 그는 자신을 도와준 포니족 원주민의 친절을 경험하고, 또 다른 아픔을 가진 이들과 교감하며 점차 변화한다. 그의 생존 투쟁은 점차 개인적인 복수를 넘어, 삶 자체에 대한 경외와 죽은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려는 숭고한 의지의 표현으로 승화된다. 이냐리투 감독은 대사를 최소화하고 오직 이미지와 배우의 육체적 현존감만으로 이 모든 과정을 그려냄으로써, 인간의 언어가 설명할 수 없는 생명력과 의지의 힘을 가장 영화적인 방식으로 증명해낸다.
"복수는 신의 손에": 피츠제럴드를 향한 집념과 그 끝에서 마주한 복수의 공허함
휴 글래스의 모든 고통스러운 여정은 단 하나의 목표, 바로 자신의 아들 호크를 죽이고 자신을 생매장한 존 피츠제럴드(톰 하디)에 대한 ‘복수’를 향해 있다. 피츠제럴드는 글래스와는 정반대의 인물로, 지독한 이기심과 생존 본능만으로 움직이는 현실적인 악인이다. 그는 신을 믿지 않으며, 오직 돈과 자신의 안위만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그의 관점에서 보면, 죽어가는 글래스를 버리고 가는 것은 합리적인 선택이었을 뿐이다. 톰 하디는 특유의 웅얼거리는 말투와 예측 불가능한 눈빛으로, 동정의 여지가 거의 없는 이기적인 인간상을 완벽하게 창조해냈다. 영화의 서스펜스는 이 두 남자가 마침내 다시 마주치는 순간을 향해 달려가며 극대화된다.
마침내 눈 덮인 강가에서 마주한 글래스와 피츠제럴드의 마지막 대결은, 영화가 던지는 복수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 응축된 장면이다. 두 사람은 인간의 언어가 아닌, 짐승의 울부짖음과도 같은 소리를 내며 서로의 살과 피를 탐하는 원초적인 싸움을 벌인다. 이 싸움에서 글래스는 마침내 피츠제럴드를 제압하고 그의 목숨을 끊기 직전까지 간다. 관객은 글래스가 그토록 원했던 복수를 완성하고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순간을 기대하게 된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글래스는 복수를 멈춘다. 그는 강 건너편에서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 아리카라 부족을 발견하고, 자신을 도와줬던 포니족 원주민이 했던 말, “복수는 창조주의 손에 달렸다”는 말을 떠올린다.
글래스는 피츠제럴드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는 대신, 그의 몸을 강물에 떠내려 보낸다. 그는 개인적인 복수를 행하는 대신, 더 거대한 순리, 즉 자연과 신의 심판에 그의 운명을 맡기기로 선택한 것이다. 이는 그의 여정이 단순히 피의 복수를 넘어선, 더 높은 차원의 영적 깨달음에 도달했음을 상징하는 중요한 전환이다. 강 하류에서 아리카라 부족에게 살해당하는 피츠제럴드의 최후는, 결국 자연의 법칙, 즉 인과응보의 순리대로 이루어진 심판처럼 보인다. 모든 것이 끝난 후, 글래스는 숲 속에서 죽은 아내의 환영을 본다. 그녀는 미소 지으며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몸을 돌려 사라진다. 모든 것을 이루었지만 이제 그에게는 돌아갈 곳도, 나아갈 목표도 없다. 그는 지친 몸을 이끌고 카메라를, 즉 관객을 똑바로 응시한다. 그의 눈빛에는 복수의 허무함, 살아남은 자의 슬픔, 그리고 앞으로 계속해서 숨을 쉬며 살아가야 할 자의 막막함이 뒤섞여 있다. 이 마지막 시선은 복수라는 행위가 결코 영혼의 구원이 될 수 없다는, 영화의 묵직한 주제를 관객의 마음에 깊이 새겨 넣는다.
결론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는 관객을 가장 원초적인 영화적 체험으로 이끄는 장엄하고도 위대한 서사시다. 이냐리투 감독의 집요한 연출과 루베즈키의 경이로운 카메라는 스크린을 살아 숨 쉬는 대자연으로 탈바꿈시켰고, 리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한 인간의 생존 의지를 육체로 증명해냈다. 이 영화는 단순한 복수극의 공식을 따르는 대신, 자연의 숭고함과 잔혹함, 인간 의지의 위대함, 그리고 복수라는 행위의 공허함에 대해 깊이 있는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모든 여정이 끝난 후, 우리를 똑바로 응시하는 휴 글래스의 마지막 눈빛은 쉽게 잊히지 않을 강렬한 잔상을 남긴다. 그것은 살아남은 모든 존재가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와 고독에 대한 서늘한 통찰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해서 숨을 쉬어야 한다는, 가장 단순하고도 가장 위대한 진리를 상기시킨다. <레버넌트>는 단순한 영화 감상을 넘어, 온몸으로 겪어내는 하나의 거대한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