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데어 윌 비 블러드>는 한 편의 영화라기보다, 미국 자본주의의 탄생 신화 이면에 감춰진 어둡고 탐욕스러운 심장을 해부하는 거대한 서사시와 같다. 이 작품은 20세기 초 석유 시대를 배경으로, 무일푼 광부에서 시작해 거대한 석유 제국을 건설하는 다니엘 플레인뷰(다니엘 데이 루이스)라는 한 남자의 일대기를 따라간다. 하지만 영화는 그의 성공 신화를 찬양하는 대신, 석유를 향한 그의 끝없는 욕망이 어떻게 그의 인간성을 잠식하고, 주변의 모든 관계를 파괴하며, 결국 그 자신을 텅 빈 괴물로 만들어가는지를 냉혹하고 집요하게 추적한다. 이 영화가 단순한 시대극을 넘어선 걸작으로 추앙받는 이유는,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전설적인 연기와 폴 토마스 앤더슨의 압도적인 연출, 그리고 조니 그린우드의 불협화음 가득한 음악이 어우러져, 인간 내면의 가장 어두운 심연을 스크린 위에 성공적으로 현현시켰기 때문이다. 이 글은 다니엘 플레인뷰라는 인물이 어떻게 ‘탐욕’ 그 자체의 화신이 되는지, 그와 대척점에 선 거짓 선지자 일라이 선데이를 통해 ‘종교’와 자본의 기만적인 관계를 어떻게 폭로하는지, 그리고 황량한 풍경과 불안한 사운드로 구축된 영화의 독창적인 ‘미장센’이 어떻게 인물의 내면을 완벽하게 반영하는지를 심도 있게 분석하고자 한다.
석유처럼 검고 끈질긴 탐욕, 자본주의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괴물 다니엘 플레인뷰
<데어 윌 비 블러드>의 서사는 전적으로 다니엘 플레인뷰라는 인물의 어깨 위에 놓여 있다. 그리고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도 무서운 캐릭터 중 하나를 창조해냈다. 영화의 첫 15분, 단 한 마디의 대사도 없이 홀로 은 광산에서 일하다 다리가 부러지고, 석유 시추에 성공하는 그의 모습은,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한 남자의 강인한 의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는 이미 평범한 성공에 대한 열망을 넘어선, 세상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는 듯한 광적인 집착이 서려 있다. 그에게 석유는 부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타인을 지배하고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한 권력의 원천이다.
그의 탐욕은 어떤 도덕이나 인간적인 감정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는 아들 H.W.를 사업 파트너처럼 데리고 다니며 ‘가족적인 유대’를 내세우지만, 이는 단지 석유 시추권을 따내기 위한 연극에 불과하다. 석유 시추 현장의 폭발 사고로 H.W.가 청력을 잃었을 때, 그는 아들의 고통보다 분출하는 석유를 보며 환희에 찬다. “내 안에는 경쟁심이 있어. 다른 누구도 성공하는 걸 원치 않아”라는 그의 대사는, 자본주의의 가장 잔혹한 본질, 즉 제로섬 게임의 논리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타인과의 공존을 거부하고 오직 독점적인 승리만을 추구한다. 자신을 잃어버린 동생이라며 찾아온 헨리마저도, 그가 가짜임을 알게 되자 일말의 망설임 없이 살해하고 암매장한다.
다니엘 플레인뷰는 단순한 악당이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이 낳은 필연적인 괴물이다. 그는 인간관계에서 위안을 찾지 못하고,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을 보면 혐오감 말고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고백할 정도로 극심한 인간 혐오에 시달린다. 그가 유일하게 교감하는 대상은 땅속 깊은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석유뿐이다. 그는 석유를 통해 세상과 연결되려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깊은 고독과 편집증에 사로잡힌다. 영화의 마지막, 모든 것을 가졌지만 텅 빈 볼링장에서 홀로 술에 취해 있는 그의 모습은, 탐욕의 끝에 남는 것이 오직 황량한 공허뿐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구부정한 자세와 깊게 울리는 목소리, 그리고 폭발 직전의 에너지를 담은 눈빛으로, 한 인간이 탐욕에 잠식되어 가는 과정을 신들린 듯한 연기로 그려내며 관객을 전율케 한다.
거짓된 종교와 노골적인 자본의 대립, 일라이 선데이를 통해 본 기만의 시대
다니엘 플레인뷰의 탐욕스러운 여정에 유일한 대항마처럼 등장하는 인물은 바로 ‘제3계시교’의 젊은 목사, 일라이 선데이(폴 다노)다. 일라이는 신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한다고 주장하지만, 그의 본질 역시 다니엘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종교를 수단으로 사람들의 헌금을 갈취하고, 공동체 내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려는 또 다른 형태의 사업가이자 사기꾼이다. 영화는 자본의 화신인 다니엘과 종교의 화신인 일라이를 통해, 20세기 초 미국을 지배했던 두 개의 거대한 힘, 즉 석유(자본)와 신(종교)이 어떻게 서로를 이용하고 기만하며 대립하는지를 흥미롭게 보여준다.
두 인물의 갈등은 처음부터 노골적이다. 일라이는 자신의 가족 땅에 석유가 있다는 정보를 다니엘에게 알려주며, 그 대가로 자신의 교회에 5천 달러를 요구한다. 다니엘은 이를 무시하고, 석유 시추관 개통식에서 자신을 축복해달라는 일라이의 요청마저 거부하며 그에게 굴욕을 안긴다. 이들의 관계는 서로의 약점을 잡고 힘을 과시하려는 위태로운 긴장감으로 가득하다. 다니엘이 인부의 사망 사고를 무마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라이의 교회에 찾아가 세례를 받는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상징적인 장면 중 하나다. 일라이는 이 기회를 이용해, 공개적으로 다니엘에게 “내 아들을 버렸다!”고 고백하게 만들고 그를 구타하며 자신의 권위를 세운다. 반대로, 훗날 몰락한 일라이가 자금난을 해결하기 위해 다니엘을 찾아왔을 때, 다니엘은 그에게 “나는 거짓 선지자고, 신은 미신이다!”라고 외치게 만들며 똑같은 방식으로 복수한다.
이 두 장면의 완벽한 대칭은, 자본과 종교가 본질적으로 같은 속성을 지닌 기만적인 시스템임을 폭로한다. 다니엘은 돈의 힘으로, 일라이는 신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지배하려 한다. 그들에게 석유와 신은 모두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영화의 충격적인 마지막 장면, 다니엘이 볼링 핀으로 일라이를 잔인하게 때려죽이는 장면은 이 두 힘의 대결이 어떤 파국으로 끝나는지를 보여준다. 다니엘은 “내가 네 밀크셰이크를 다 마셨다!”고 외치며, 자본이 결국 종교마저 집어삼키는 최종적인 승리를 선언한다. 이는 단순히 두 인물의 대결을 넘어, 세속적인 자본주의가 종교적 가치를 압도하게 되는 미국 현대사의 축소판처럼 읽히기도 한다. 폴 다노는 광신적인 믿음과 교활한 탐욕 사이를 오가는 일라이의 모습을 섬세하고도 강렬한 연기로 표현하며,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함께 영화의 팽팽한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황량한 황야를 채우는 불협화음의 미장센, 그의 내면적 고독을 증폭시키는 소리의 풍경
<데어 윌 비 블러드>의 압도적인 분위기는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독창적인 미장센과 조니 그린우드의 실험적인 음악이 만나 완성된다. 영화의 주된 배경인 캘리포니아의 황량하고 삭막한 풍경은, 그 자체로 등장인물들의 텅 빈 내면을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한다. 로버트 엘스윗 촬영감독은 광활하지만 생명력 없는 황야의 모습을 장엄하면서도 쓸쓸하게 담아내며, 그 속에서 석유를 찾아 헤매는 인간들의 모습을 한없이 왜소하게 그린다. 특히, 땅에서 검은 석유가 맹렬하게 뿜어져 나오는 장면은, 마치 대지의 피가 터져 나오는 듯한 강렬하고도 불길한 이미지로, 앞으로 닥쳐올 비극을 암시한다.
영화의 시각적 스타일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바로 청각적 경험이다. 라디오헤드의 기타리스트인 조니 그린우드가 작곡한 영화 음악은 전통적인 영화 음악의 문법을 완전히 파괴한다. 그는 아름다운 멜로디 대신, 불협화음으로 가득 찬 현악 연주와 날카로운 타악기 사운드를 사용하여 영화 전체에 불안하고 신경질적인 기운을 불어넣는다. 이 음악은 인물의 감정을 설명하거나 관객을 위로하는 대신, 오히려 인물들의 내면에 들끓는 혼돈과 광기를 증폭시키고 관객을 불편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다니엘이 광활한 풍경을 바라보는 평화로워 보이는 장면에서도, 배경에서는 귀를 긁는 듯한 불협화음이 흘러나오며 그의 평온이 거짓임을, 그리고 그의 내면이 결코 채워질 수 없는 공허함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영화는 기계 소리, 바람 소리, 석유가 뿜어져 나오는 소리 등 다양한 효과음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소리의 풍경을 구축한다. 특히 석유 시추 장비가 둔탁하게 돌아가는 소리는, 마치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기계가 멈추지 않고 돌아가는 소리처럼 들리며 영화의 주제를 청각적으로 강화한다. 이처럼 <데어 윌 비 블러드>는 황량한 이미지와 불협화음의 사운드라는 독창적인 미장센을 통해, 인물의 내면 풍경과 시대의 분위기를 완벽하게 직조해낸다. 관객은 영화를 보는 내내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과 압박감을 느끼게 되는데, 이는 바로 다니엘 플레인뷰라는 인물이 느끼는 내면적 고독과 광기를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결론
<데어 윌 비 블러드>는 편안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2시간 38분 동안 인간의 탐욕이 어디까지 이를 수 있는지를 한 치의 타협도 없이 보여주는, 불편하고도 위대한 예술 작품이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미국의 건국 신화 이면에 숨겨진 자본주의와 종교의 추악한 민낯을 거대한 스케일과 집요한 디테일로 파고들었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연기는 단순한 연기를 넘어, 한 인간이 시대를 만나 괴물로 변해가는 과정을 온몸으로 증명해낸 일종의 행위 예술에 가깝다. 영화의 마지막, “나는 끝났다(I'm finished)”는 다니엘의 마지막 대사는 모든 것을 가졌지만 결국 모든 것을 잃어버린 한 남자의 공허한 독백이자, 탐욕으로 점철된 한 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서늘한 선언이다. <데어 윌 비 블러드>는 쉽게 소화하기는 어렵지만, 한번 보고 나면 결코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이미지와 질문들을 관객의 마음에 남기는, 영화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깊고 어두운 경지를 보여준 현대의 고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