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커: 병든 사회가 키워낸 망상, 광기의 상징으로 재탄생한 한 남자의 비극

토드 필립스 감독의 <조커>는 코믹북 원작 영화의 경계를 허물고, 한 인물에 대한 집요하고도 불편한 심리 탐구를 통해 현대 사회의 병폐를 고발하는, 우리 시대의 가장 문제적인 걸작이다. 이 영화는 슈퍼히어로의 대척점에 있는 빌런의 기원을 다루지만,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대결이나 화려한 액션 시퀀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카메라의 차갑고 건조한 시선은 오롯이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이라는 한 남자의 영혼이 무너져 내리는 과정을 고통스러울 정도로 내밀하게 따라간다. 이 영화가 베니스 국제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며 전 세계적인 찬사와 논란을 동시에 불러일으킨 이유는, 아서의 광기가 단순히 개인의 정신 질환 문제를 넘어, 그를 벼랑 끝으로 내몬 무관심한 사회 시스템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조커>는 한 편의 잘 짜인 비극이자, 사회가 가장 연약한 개인을 어떻게 괴물로 만드는지에 대한 냉혹한 보고서다. 이 글은 아서 플렉이라는 인물이 어떻게 병든 사회의 거울이 되는지, 그의 고통스러운 웃음과 망상이 현실과 진실의 경계를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그리고 한 개인의 비극이 어떻게 광기 어린 혁명의 상징으로 전이되는지를 깊이 있게 추적하고자 한다.

"내 인생이 비극인 줄 알았는데, 코미디였어": 무너진 사회가 외면한 한 남자, 아서 플렉의 병리 보고서

<조커>의 배경이 되는 1980년대 초의 고담시는 단순한 도시가 아니라, 그 자체로 병들어 서서히 죽어가는 유기체다. 거리에는 쓰레기 더미가 산을 이루고, ‘슈퍼 쥐’가 들끓으며,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골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깊다. 시 정부는 예산 삭감을 이유로 아서 플렉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 의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사회 복지 서비스마저 끊어버린다. 영화는 이러한 사회적 배경을 통해 아서의 비극이 결코 개인적인 문제만으로 치부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그는 ‘웃음 발작’이라는 신경계 질환을 앓고 있으며, 코미디언을 꿈꾸지만 아무도 그의 농담에 웃어주지 않는다. 그는 세상과 소통하고 싶어 하지만, 세상은 그를 투명인간 취급하거나 조롱과 폭력으로 응답할 뿐이다.

아서 플렉의 서사는 사회적 외면이 한 인간을 어떻게 파괴하는가에 대한 잔인한 기록이다. 그는 상담사에게 "당신은 내 말을 듣고 있지 않아요"라고 반복해서 말하지만, 상담사 역시 시스템의 부속품처럼 영혼 없는 질문만을 던질 뿐이다. 그가 길거리에서 광고판을 들고 있다가 10대들에게 무자비하게 폭행당하는 오프닝 시퀀스는, 그가 겪어야 할 고난의 서막을 알리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사회는 그의 존재를 인정해주지 않으며, 그의 고통에 무관심하다. 유일한 안식처여야 할 어머니는 그에게 망상에 가까운 희망("넌 세상을 웃게 만들기 위해 태어났단다")을 주입하는 동시에, 그의 가장 끔찍한 트라우마의 원인이기도 했다.

이처럼 모든 사회적 안전망과 인간관계로부터 철저히 고립된 아서는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든다. 그가 지하철에서 자신을 조롱하던 월스트리트 금융맨 세 명을 우발적으로 살해하는 사건은 그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다. 처음으로 그는 사회로부터 ‘반응’을 얻는다. 언론은 이 사건을 부자들에 대한 하층민의 분노 표출로 규정하고, 광대 가면은 저항의 상징으로 떠오른다. 역설적으로 아서는 폭력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증명하게 된 것이다. 토드 필립스 감독은 폭력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진공 상태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아서의 붕괴는 개인의 심리적 결함과 사회 시스템의 구조적 실패가 결합하여 만들어낸 필연적인 비극이다. "내 인생이 비극인 줄 알았는데, 코미디였어"라는 그의 독백은, 자신의 삶이 더 이상 슬픔조차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부조리하고 무가치하다는 것을 깨달은 자의 처절한 자기 고백이자, 그를 그렇게 만든 세상에 대한 냉소적인 고발이다.

고통스러운 웃음 뒤에 가려진 진실: 소피와의 관계를 통해 본 망상과 현실의 위태로운 경계

<조커>가 관객을 혼란과 불편함 속으로 몰아넣는 가장 중요한 장치는 바로 '믿을 수 없는 화자'로서의 아서 플렉의 시점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서의 시점을 따라가지만, 그의 정신 상태가 불안정해지면서 관객은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그의 망상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이러한 장치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이웃 여성 소피(재지 비츠)와의 관계다. 아서는 우연히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소피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녀와 데이트를 하고, 힘든 시기에 위로를 받는 로맨틱한 관계를 이어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소피는 아서의 코미디 공연을 지켜봐 주고, 아픈 어머니를 간병하는 그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유일한 이해자처럼 그려진다.

관객은 이 관계를 통해 아서가 잠시나마 현실에서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된다. 하지만 영화는 후반부에 이르러 이 모든 것이 아서의 머릿속에서 일어난 완전한 망상이었음을 잔인하게 폭로한다. 아서가 불쑥 소피의 집에 찾아갔을 때, 소피는 그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두려움에 떨며 나가달라고 애원한다. 이 장면에서 관객은 아서의 시선에 속아왔음을 깨닫고 충격에 빠진다. 그가 느꼈던 유일한 온기와 인간적 교감마저 스스로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 반전은 단순히 서사적 트릭을 넘어, 아서의 고독과 고립이 얼마나 절대적인지를 관객의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그는 현실에서 단 한 번도 따뜻한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으며, 그의 유일한 위안은 망상 속에서만 가능했다.

이러한 망상과 현실의 혼재는 영화의 다른 부분에서도 암시된다. 그가 자신의 우상인 머레이 프랭클린(로버트 드 니로)의 쇼에 관객으로 참여해, 머레이로부터 아버지처럼 따뜻한 인정을 받는 장면 역시 그의 망상일 가능성이 높다. 영화의 마지막, 정신병원에 수감된 그가 상담사를 살해했음을 암시하며 피 묻은 발자국을 남기고 복도를 걸어가는 장면 또한 마찬가지다. 어쩌면 영화 전체가 정신병원에 갇힌 아서가 꾸며낸 하나의 거대한 농담일지도 모른다는 해석마저 가능하게 한다. 영화의 핵심 상징인 그의 ‘웃음’ 역시 이러한 모호성을 증폭시킨다. 그의 웃음은 즐거워서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극도의 고통과 슬픔 속에서 통제 불가능하게 터져 나오는 질병의 증상이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이 병적인 웃음은 점차 세상의 부조리를 향한 조롱과 저항의 표현으로 변모한다. 이처럼 <조커>는 망상과 현실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허물어뜨림으로써, 객관적인 진실이 부재하는 한 남자의 내면을 관객이 직접 체험하게 만들고, 그의 광기에 대한 단순한 동정이나 비난을 넘어선 복합적인 감정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다.

광대의 가면을 쓴 혁명의 상징: 머레이 쇼에서 완성된 조커의 탄생과 고담의 광기 어린 폭동

아서 플렉 개인의 비극은 머레이 프랭클린 쇼를 기점으로 도시 전체의 광기 어린 폭동으로 전이되며, 그는 마침내 '조커'라는 상징으로 재탄생한다. 지하철 살인 사건 이후, 광대 가면은 고담시의 불만에 가득 찬 시민들 사이에서 부자들과 권력에 저항하는 아이콘이 된다. 아서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의 행동은 사회에 억눌려 있던 사람들의 분노에 불을 지피는 도화선이 된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이름 없는 아서 플렉이 아니라, 익명의 광대 중 한 명으로서 사회적 의미를 부여받기 시작한다.

이러한 변화의 정점은 머레이 프랭클린 쇼에 게스트로 출연하는 장면에서 폭발한다. 이전까지 수동적으로 고통을 감내하던 아서는, 스스로를 '조커'라고 명명하고 광대 분장을 한 채 무대에 선다. 그는 더 이상 남을 웃기려는 어설픈 코미디언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비웃고 조롱했던 머레이와 세상 앞에서, 자신의 논리를 당당하게 펼치는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다. 그는 "정신질환을 앓는 외로운 사람을 사회가 쓰레기처럼 내버려두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당신들이 원하는 걸 얻게 되는 거죠!"라고 외치며 자신의 모든 범죄를 정당화하고, 생방송 중에 머레이를 총으로 쏴 살해한다. 이 충격적인 행위는 아서 플렉이라는 개인의 완전한 죽음이자, '조커'라는 혼돈의 상징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아서의 살인은 도시 전체를 마비시키는 거대한 폭동을 촉발시킨다. 광대 가면을 쓴 수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불을 지르고, 상점을 약탈하며, 토마스 웨인 부부를 살해하기에 이른다. 이 장면은 한 개인의 광기가 어떻게 사회 전체의 광기로 전염될 수 있는지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무서운 스펙터클이다. 경찰차에 실려 가던 아서는 폭도들에 의해 구출되고, 그는 부서진 경찰차 보닛 위에서 군중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으며 춤을 춘다. 그는 피를 이용해 자신의 얼굴에 핏빛 미소를 그려 넣는다. 평생을 투명인간처럼 살아왔던 그는, 이제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린 메시아이자 혁명의 상징이 된 것이다. 영화는 이 결말을 통해 희망이나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시스템에 의해 억압된 분노가 출구를 찾지 못할 때 얼마나 파괴적인 형태로 분출될 수 있는지를 섬뜩하게 경고한다. 조커의 탄생은 영웅의 등장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실패했음을 알리는 비극적인 징후이며, 그의 광기 어린 춤은 고담시의 장송곡처럼 울려 퍼진다.

결론

<조커>는 관객에게 깊은 불편함과 동시에 강렬한 몰입감을 선사하는, 양날의 검과 같은 영화다. 호아킨 피닉스의 신들린 연기는 아서 플렉의 앙상한 육체와 뒤틀린 영혼에 생명을 불어넣으며, 관객이 그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게 만든다. 토드 필립스 감독은 감각적인 연출과 첼로 선율이 돋보이는 음울한 음악을 통해, 붕괴 직전의 도시와 한 남자의 심리를 완벽하게 조응시킨다. 이 영화는 조커라는 빌런을 미화하거나 그의 폭력을 옹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왜 괴물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사회 구조적인 맥락에서 집요하게 파고들며, 우리 사회가 애써 외면하고 있는 어두운 진실을 스크린 위에 펼쳐 보인다. '조커'의 탄생은 한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그를 품지 못한 우리 모두의 실패일지도 모른다는 서늘한 질문을 던지며, 영화가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관객의 마음속에 무거운 잔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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